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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rmur

잘가. 진규수


규수야. 아까 어처구니 없는 전화를 받았다. 너 백혈병으로 세상떴다고.
듣는 순간 이걸 씨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감이 안잡히더라.
고등학교. 종로학원서 재수생활. 짧다면 짧은 시간을 공유했던 친구였는데 그 이후로 간간이 들려오던 소식마저 끊어질만큼 우리가 겹친 생활이 옅어졌을 무렵 강력한 한방으로 제대로 날려주는구나.


흑인틱한 두꺼운 입술때문에 난 널 뉴욕닉스 센터였던 패트릭 유잉같은 새끼라 놀렸고 너는 그 무렵 가당치도 않은 힙합이랍시고 통이 넓은, 거의 개량한복같은 청바지를 입고 다니면서 바닥을 쓸었었다. 벽에 높이 설치된 가스 파이프에 종이를 구겨서 집어넣는 파이프 농구에서는 실제로 유잉같은 괴력을 가끔 발휘했었고, 언제부턴가 시현이만 보면 반사적으로 달려들곤 했었다. 종종 어처구니 없는 말과 행동으로 주변사람을 웃게 만들었고, 김신효 선생님과 서원호 선생님은 너를 특히 이뻐했었다. 일호와 승봉이를 놀리는 것을 좋아했었고, 수능점수 나온 다음날 괜찮냐고 물어보니 덤덤한 얼굴로 "나 재수할꺼야 "라고 했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린 종로학원에서 만났었다. 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가끔씩 상계역에서 만나 지하철을 타고 학원으로 갈동안 바로앞에 앉아있는 사람과 눈싸움을 벌여서 싸움날뻔한것을 내가 뜯어 말린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게 끝이구나. 연대 갔다는 소식, 연합뉴스 들어갔다는 소식. 이게 전부다였는데 이제는 더이상 들을 소식도 없다. 사진이 있는지 찾아봤더니 졸업사진 외에는 2학년 말 찍었던 단체사진 한장이 전부구나.




네이버에서 니 이름을 쳐보니 너를 추모하는 분이 만드신 블로그가 있더라. 너 참 그분들에게 소중한 남자였던 것 같다. 그런분들 남겨두고 떠나기가 얼마나 힘들었겠냐. 언젠가 친구결혼식에서 만나 반갑다고 웃으면서 손잡고 인사하고 소주한잔 먹을수 있었을텐데..뭐라 표현하기가 어렵잖아.

좀전에 미아삼거리역에서 나에게 니 소식을 알려준 훈이와 함께 만나 짧게나마 너를 추모했다. 예전 얘기들을 하는데 재미있는 고등학교 시절을 우린 보냈었구나. 이번주 토요일에 우리둘은 니가 있다는 용미리로 가볼 예정이다. 그날 비가 안오면 좋을텐데.

99년부터 끊어졌던 우리 왕래가 이렇게 시작되는가보다. 왜 하필이면 이렇게 다시 시작되는건지 슬프다.
...
썅 뭐이리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네

....


규수야
잘가라. 좋은데서 푹 쉬어라.










3월 30일 추가


오늘 집에서 고등학교때 앨범을 뒤져보니 1학년때 경주에 수학여행가서 규수와 찍은사진이 있길래 올린다.




















 지금 생각났는데 공부를 열심히 하는것 같지 않으면서도 모의고사에서 좋은 점수를 받는 것을 보며 신기해하자 그때 너는 자신을 손가락질하며 내게 그랬었다. 

"난 천재니까" 

마치 채치수가 강백호 흉내를 내는것 같았었지. 


 1학년때 니가 33번인가 그랬고 내가 35번이었었나, 그리고 민기가 34번인가 그랬다. 자리 배치상 초반부터 자주 마주칠수 밖에 없던 구조였지. 당시 내가 민기얼굴을 단 5초만에 네모와 동그라미 만으로 완벽하게 그릴수 있었던건 니 연습장에 그려진 민기 그림덕분이었다. 


 그 때 국사선생님이셨던 김희락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입맛다시는 퍼포먼스로 꽤나 우리들을 흥미롭게 했었다. 그걸 그대로 놓치지 않았던 너는 국사시간 내내 선생님의 입맛다시는 모습을 카운트했고 69까지 세고 수업이 마무리 될 무렵 70 이란 숫자를 못 채운것에 내심 아쉬워할 때 극적으로 선생님께서 마이크잭을 빼시며 입맛다시는 것을 보고 주먹을 불끈 쥐었었다. 


 독실한 영어선생님이셨던 연로하신 송XX 선생님(성함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께서는 수업시간에 기도를 비록한 성경구절을 인용하시는 것을 즐겨하셨다. 온몸으로 하나님의 기적이란 것을 실천하시려고 애쓰셨던 분이셨는데 영어와 실질적인 관련이 없는 무슨 질문을 해도 성령충만한 답변을 하시던 진지한 모습이 우리에겐 조롱의 대상으로 비춰졌었다. 당시 나는 우리반 수업이 시작할때부터 "바퀴벌레도 죽으면 천국에 가나요?" 등등의 쓸데없는 질문부터 시작해서 선생님의 답변에 꼬투리를 잡아 수업시간을 잡아먹었었는데 내게 질문하라고 가장 많이 사주했던 사람이 바로 규수 너였다. 


 3년전 동네에서 서원호 선생님을 만났었다. 고등학교 졸업후 꽤나 오랜만인데도 그 선생님은 나에게 "규수는 잘지내니?" 라고 물으시더군. 그 선생님 너를 정말  꽤나 이뻐하셨었었지. 너의 소식을 아시면 어떤 말씀을 하실까..


 규수 니가 없는 지금, 비록 십여년 동안 연락이 끊어졌었지만 예전 모습을 돌이켜보니 하나둘씩 떠오르는구나. 내가 기억하고 있는 니모습을 이곳에 쓰는게 그동안 너를 아껴왔던 분들에게 해가되는것이 아닌가 걱정된다. 


 잘 쉬어라. 토요일에 보자.